백범 “인천은 내 인생에서 뜻깊은 곳”(인천과 백범 김구 시리즈2)
백범 “인천은 내 인생에서 뜻깊은 곳”(인천과 백범 김구 시리즈2)
  • 이두 기자
  • 승인 2018.11.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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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에 용궁우물터 내리교회 등 인천 곳곳 등장두 번의 감옥 생활… 광복 후 인천을 가장 먼저 찾아
인천대공원에 있는 백범 설명 표지판. 외진 곳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인천과 백범 김구 시리즈’ 두 번째다. 김구 선생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인천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만큼 인천은 백범의 삶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광복 이후 백범은 지방순회를 할 때 인천을 가장 먼저 찾았다. 백범일지에는 자신이 갇혀 있던 인천감리서 감옥 생활을 비롯해 탈옥 도주로, 인천항 축성 과정,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옥바라지 과정 등이 실려있다. 인천감리서를 비롯해 인천역, 용동우물터, 답동성당, 내리교회, 중동우체국 등이 등장한다. 지난 2017년 백범일지 발행 70주년을 기념해 특집을 만들었던 인천 시정 홍보지 ‘굿모닝 인천’의 백범 김구 내용을 옮겨 싣는다.

◆백범일지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인천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으로 이감된 까닭은 갑오경장 이후 외국인 관련 사건을 심리하기 특별재판소가 인천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으로 경무청, 오른편으로 순검청이 있었다. 순검청 앞으로 감옥이 있고 그 앞에 노상을 통제하는 이층 문루가 있다’ -첫번째 투옥 수감 생활중
‘이 항구는 가장 먼저 열렸기 때문에 구미 각국인이 와서 살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자들도 있었으며 여러 종교의 교당도 세워져 있었다. 또 우리 사람으로 더러 외국에 장사하러 다녀와 신문화의 취미를 아는 자도 조금은 있던 때다.“ -옥중에서 신서적 탐독
‘인천옥에서 사형수 집행은 늘 오후에 끌고 나가 우각동에서 목을 매달았다’ 우각동은 현재 경인전철 도원역 인근이다.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다. 스물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인천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자를 위해 어머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해 전 기억이 어제인 듯 새롭다.’
‘인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인천 개항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인천은 내 일생에 있어 뜻깊은 곳이다. 21살에 인천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23살에 탈옥 도주했고, 39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고 기술했다.

◆백범이 수감됐던 인천감리서, 어머니가 인근서 옥바라지
감리서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제물포의 조계지 관리를 비롯해 외국인 입출항의 외교업무와 무역․관세의 통상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이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며 감리서가 설치된다. 지금 신포동쪽에서 자유공원쪽으로 올라가는 ‘인천신포스카이타워’아파트가 바로 그곳이다. 아파트 앞에 감리서 였다는 표지가 있다.
개항이 되고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감리서는 점차 역할이 커져 인천부(현 인천시청)의 역할에 개항장재판소와 학교 기능까지 함께 한다. 행정, 사법 기능에 교육기관이 들어선,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복합행정타운’이었다. 눈에 띠는 것은 감리서에는 감옥이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죄인이 볼기맞는 비명소리가 담장을 넘어 인근 민가에 들렸다고 한다. 
당시 감리아문 청사는 한옥 단층 건물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옥에 유리창이 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범 김구도 이 감리서에 잡혀있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내리로 왔다. 백범일지에는 곽낙원 여사의 옥바라지 생활이 적혀 있다. 곽낙원 여사가 식모살이를 하며 옥바라지를 했던 집은 지금의 인천내리성당 인근, 음식점 월야천 인근 골목으로 추정된다.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이 입수한 백범일지 표지.

◆보물인 백범일지… 최근 한국근대문학관이 서명본 입수
백범일지(白凡逸志)는 독립운동의 증언서이자 유서이다. 중국 상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책을 김지림이 윤문해 간행했다. 1947년 12월 15일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아들 김산이 처음 펴냈다.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10여본 넘게 발행했다. 상편은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머리말을 1925년 5월 3일 상해에서 기록한 것으로 나와있다. 하권은 충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집필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보물 제1245호이며 친필 서명본은 희귀하다.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이 최근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2권을 입수했다. 한국근대문학관은 "초판만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입수한 친필 서명본은 재판과 3판"이라며 "'백범일지' 모든 판본을 소장하게 됐다"고 했다.
이번 '백범일지' 친필 서명에는 백범의 흔들린듯한 독특한 필체가 그대로 남아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수전증을 앓았기 때문이다. 백범은 이를 두고 농담삼아 '총알체'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관이 입수한 '백범일지'는 각각 '김기한'과 '주계동'이란 사람에게 준 것인데 증정 시기는 모두 1949년이다.
◆영화 ‘대장 김창수’는 백범의 인천 감옥 생활 그려내
2017년 영화 ‘대장 김창수’가 상영됐다. 백범 김구가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 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감리서 생활을 하며 조선인들 사이에서 대장으로 거듭나기까지 625일간을 그린 이야기이다.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인천 감리서를 비롯한 인천 일대다. 일본인 살해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본영사관이 포함돼 조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곳이 바로 인천 개항장재판소였다. 김구는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해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국왕 고종의 재가로 사형 집행은 면했으나 감옥 밖의 구출 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깨달은 백범은 탈옥한다.
우여곡절 끝에,만수동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벼리고개(별고개, 星峴)를 넘어 당일 양화진(楊花津) 나루에 도착, 서울에서 여러 날을 보내고 다시 삼남(三南) 지방으로 피신했다. 인천감리서에서 탈옥한 김구는 1900년 그의 구명을 애써준 김주경을 만나러 강화도에 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고 3개월간 강화에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해방 후 귀국한 김구가 가장 먼저 수소문을 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김주경이다. 해방 후 김주경과 관련한 사람들을 찾아 강화에 온 김구가 김주경의 집이 있던 자리에 지은 1928가옥을 찾은 것이다. 강화도는 김구가 독립운동가 유완무를 만나 그의 권유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바꾼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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